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당(四溟堂)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일명 휴정(休靜)이라고도 하는데 자(字)는 현응(玄應)이요, 호(號)는 청허자(晴虛子)로 속세에서의 성은 최(崔)씨였다.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四溟堂)은 일명 송운유정(松雲惟政)이며 자는 이환(離幻)이요, 속세의 성은 임(任)씨로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子)였다. 두 사람은 고승으로 유명하지만 사제지간으로도 더욱 유명하여 많은 일화가 남아있다.
어느 날 사명당이 스승인 서산대사와 도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묘향산(妙香山)을 내려오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평안도를 거쳐 황해도와 경기도를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강원도에 이르렀다.
지난번에 자신의 수도장인 묘향산에 서산대사가 왔을 때, 선녀들이 날라다 준 밥을 먹는다고 자랑하며 자신의 도술을 은근히 발휘해 보려고 했으나, 그날따라 선녀가 밥을 가져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망신만 샀다. 서산대사가 떠나면서
"내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밥을 먹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산대사가 떠난 뒤에 선녀들이 밥을 가지고 왔다.
"제 시간에 가져오려고 했지만 천상식관(天上食管)에게 늦어도 괜찮다는 서산대사의 말씀에 따라 이제 왔소이다." 하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보다 스물셋이나 아래였으므로 그 기백이나 패기는 서산대사보다 앞섰지만 그래도 스승만한 제자가 없다는 말처럼 도술에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게 뒤졌다. 사명당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자신의 도술이 서산대사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그 후부터 더욱 분발하여 도술을 연마해 이제는 서산대사와 견주어 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명당이 도술을 걸어 동서남북을 종횡무진하고 다닐 무렵, 세상에서는 서산대사가 사명당보다 한 수 위라는 세론이 지배적이었다. 사명당은 자신이 서산대사만 못하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서산대사의 신출귀몰하고 신비에 쌓인 도술에 다소 위축감도 없지 않았다.
"이번 기회야말로 서산대사와 선의의 경쟁을 하여 천지조화를 부리는 서산대사를 궁지에 빠지게 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결심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덧 서산대사가 수도하고 있는 금강산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했다.
우거진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며 돌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은 태고의 신비를 더해 주었다.
사명당이 험준한 계곡을 축지법이 아닌 발걸음으로 오르고 있을 때 서산대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를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돌리며 상좌승을 조용히 불렀다.
"지금 저 아래 계곡에는 묘향산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사명당이란 스님이 오고 있으니 어서 가서 모셔오라."고 했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상좌승은 깜짝 놀랐다.
"사명대사께서 수도하시는 묘향산과 여기 장안사는 아주 먼 거리인데 아무 전갈도 없이 올 까닭이 있겠습니까?"
서산대사는 조용히 손바닥을 펴 보였다.
"봐라, 저기 오고 있지 않느냐."
상좌승은 서산대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 또 한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손바닥 안에는 사명당이 오고 있는 모습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상좌승이 사명당을 마중하려고 떠날 때, 서산대사는 다시 상좌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계곡을 쭉 내려가다 보면 사명당이 물을 거꾸로 몰아 역류시키며 올라올 것이니라.
상좌승은 서산대사의 예지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좌승이 부지런히 내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무렵이었다. 놀랍게도 계곡의 맑은 물이 역류하며 물방울을 튕기는 곳에 이르자 사명당이 올라오고 있음이 눈에 띄었다.
상좌승은 사명당 앞으로 다가갔다.
"스님, 스님께서는 정녕 사명대사이십니까?"
사명당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산대사가 마중을 보낸 상좌승임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서산대사보다 한 수 뒤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마중 나온 상좌승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장안사에 당도하여 법당으로 들어설 무렵 서산대사는 법당의 돌계단을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사명당은 인사에 앞서 공중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생포하여 움켜잡고 서산대사에게,
"대사님, 소승이 쥐고 있는 이 참새가 죽었을까요, 아니면 살아 있을까요?"
하고 첫 질문을 가볍게 던지자, 서산대사는 껄껄 웃으면서,
"손안에 쥐고 있는 새이므로 그 새의 생사는 오직 사명당에게 달려 있을 뿐이오. 내가 죽었다고 하면 새를 그대로 날려 보낼 것이고, 살았다고 하면 손을 꼭 쥐어 살생도 불사할 테니 말이오."
서산대사의 대답에 사명당은 주먹 안에 있던 새를 허공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서산대사가 내려오던 돌계단을 다시 올라 법당 문턱을 넘어서면서 사명당에게,
"대사. 내가 지금 한 발을 법당 안에 또 한발은 법당 밖에 있는데, 내가 밖으로 나갈 상이요 법당 안으로 들어갈 상이요?"
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를테면 조금 전 사명당의 새에 관한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사명대사가, 틀림없이 내가 밖으로 나올 거라고 하면 안으로 들어 갈 것이고,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 밖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자 서산대사가 사명당에게,
"대사 무엇하시오. 답을 내려야 할게 아니요?" 하고 독촉을 하자 사명당은, 내가 멀리서 왔으니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을 하는 것보다는 나와서 손님대접을 할 거란 생각으로
"예, 대사님. 지금 법당 밖으로 나오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해놓고도 서산대사가 '아니요, 나는 법당에 들어 갈 겁니다.' 한다면 큰 낭패라고 생각했다.
"그렇소. 대사가 묘향산에서 예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손님대접을 하기 위해서 나가야지요."
하면서 돌계단을 내려왔다.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그 같은 너그러운 마음에 고마운 생각을 가지면서 서산대사와 정중한 예의를 나눈 뒤 자신이 묘향산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 정식으로 도술을 겨루어 볼 것을 제의했다.
서산대사 역시 풍문에 사명당의 도술이 비범하다는 것을 아는 터라 쾌히 승낙을 했다. 그리고 먼저 사명당의 도술을 발휘해 보라고 하자 사명당은 일기당천(一騎當千)한 모습으로 지고 온 바랑에서 바늘이 가득 담겨있는 그릇 하나를 꺼내 방바닥에 놓고는 한참동안 무언응시(無言鷹視)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그릇에 담겨 있던 바늘이 흰 국수로 변하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보란 듯이 국수를 먹으며 서산대사에게,
"사부님 시장하실 텐데 좀 들어보시지요."
서산대사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사명당이 권하는 국수를 먹어 치웠다.
"아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묘향산에서 이곳까지 국수를 가지고 오시다니 참으로 잘 먹었습니다. 모두가 사명대사의 덕이지요."
사명당은 자신의 도술이 일단 성공적이라 생각하고 서산대사에게 물었다.
"대사님, 바늘이 국수가 되었으니 속이 거북하지는 않으신지요?"
"글쎄요… 그런데, 사명대사께서 이미 내 뱃속에 들어 있는 국수를 다시 바늘로 변환 시킬 수는 없는지요?"
사명당은 바늘을 국수로 만들 수는 있어도 국수를 도로 바늘로 변환할 수는 없었다.
"이미 봄이 지나 가을이 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국수가 바늘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서산대사는 빈 그릇에 아까 먹었던 국수를 반짝거리는 바늘로 변환하여 뱉어내는 것이었다. 당황한 사명당은,
"소승이 졌습니다." 라고 항복했다.
그리고는 다시 바랑에서 계란 백여 개를 꺼내더니 일직선으로 쌓아 올렸다. 쌓아 올인 계란높이는 수척(數尺)에 이르러 바람만 조금 불어도 허물어져 내릴 듯 조마조마하였다.
"자아, 이젠 대사님 차례입니다."
사명당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서산대사에게 은근히 독촉을 했다. 보고만 있던 서산대사는 사명당과는 정반대로, 허공에서부터 거꾸로 계란을 쌓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래서 쌓아올리기도 어려운데 허공에서 거꾸로 쌓아 내려오다니, 계란을 다 쌓은 서산대사는 일직선으로 된 계란을 공중에 뜬 상태로 몇 차례 회전시킨 다음, 지팡이로 만들었다.
"대사, 지팡이가 낡은 것 같으니 이것을 짚고 다니시지요."
하면서 계란 지팡이를 사명당 무릎 앞에 정중히 놓았다.
초조해진 사명당은, 이번에야말로 최후의 비장술(秘藏術)로 서산대사를 깜짝 놀라게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합장을 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커먼 먹구름이 금방 장안사의 창공을 덮어씌우며 어두워졌다. 그리고 바른 손만을 바닥에 짚은 채로 허공에 거꾸로 둥둥 떠서 다시 주문을 외우자, 천둥이 치고 시작하고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져 금방이라도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될 듯한 기세였다. 사명당의 위세는 당당하다 못해 광기(狂氣)마저 서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후 사명당이 도술을 풀고 원점으로 돌아오자 모든 것은 다시 평온해졌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사명당에게 서산대사는,
"참으로 대사는 말 듣던 대로 도술이 대단합니다." 라고 칭찬을 해 주었다.
"원 별 것도 아닌데, 대사님도 겨우 이걸 가지고 뭘 칭찬까지 하십니까."
사명당은 이만하면 감히 누가 내 도술을 따라올 수 있으랴 하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서산대사는 자신의 차례임을 알아, 아까 사명당이 합장한 모습 그대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서산대사가 한참동안 합장을 하고는 곁에 있던 지팡이를 허공으로 집어던지자 사명당이 도술을 걸때와 같이 이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둥 번개가 일기 시작하더니 폭우가 쏟아져 사방이 물바다가 될 듯한 기세였다. 그런가 하면 서산대사는 허공에 선 채로 내리던 폭우를 다시 하늘로 거꾸로 올라가도록 조화를 부렸다. 뿐만 아니라 계절을 자유자재로 변화시켜 한동안 꾀꼬리가 우는 푸른 봄을 만들기도 하고, 얼마 있다가는 함박눈으로 온 산천을 뒤덮는가하면, 그 가운데서도 먹음직스런 감이 주렁주렁 열리게 하는 도술 등을 연출하였는데, 사명당으로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도술이었다.
이윽고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자, 사명당은 서산대사에게 무릎을 꿇었다.
"대사님, 진작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사님을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매한 소승을 용서하십시오."
그 후 사명당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도술을 스승인 서산대사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임을 깨달아 감히 겨루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