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쉬어가는 페이지

남이장군

김 대령 2010. 5. 21. 08:47

 

南怡將軍 豪征詩

白頭山石摩刀盡   백두산 석 칼 갈아 다 없에고
頭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 말 먹여 다 없에니
男兒二十未平國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惟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지정연월일 : 1973년 7월 10일

               *소장 : 화령 남씨 종중         

*소재지 :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묘 

춘천에 있는 남이섬은 본래 섬이 아니었으나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생긴 섬이다. 이섬에는여러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넓은 잔디밭이 있는  관광지로 춘천권에서는 가장 많은 개발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 섬을 남이섬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장군이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기때문이다.

남이장군은 조선 세종조의 인물로서 왕족(외척)이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으며,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등극한후 그의 공적을 두려워한 유자광 등에게 역적으로 몰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남이 장군은 세조 재위 시절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야인을 정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당대의 호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이 장군의 곁에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유자광이었습니다.
 
유자광은 남이 장군과 함께 북방의 야인들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으나 남이 장군이 병조판서에 오를 때 그는 고작 병조참지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유자광이 서자(첩의 아들)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공이 남이 장군의 공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유자광은 이 일을 늘 마음에 두고 남이 장군을 시기하며 모해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남이 장군이 대궐에서 숙직을 하다가 바람도 쏘일 겸 대궐 마당에 나갔는데 밤하늘에 갑자기 혜성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혜성을 본 사람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라며 저마다 한마디씩 수군거렸지만 남이 장군은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허허! 혜성이 나타난 것을 어찌 불길한 징조로만 생각하는 것이오! 내가 보기엔 저 혜성이야말로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 나라를 이롭게 할 징조 같소이다.”
남이 장군이 이렇게 말하자 사람들 틈에 끼여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유자광은 사악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다음날 유자광은 입궐하자마자 예종을 찾아가 아뢰었습니다.
 “전하,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오나 역모의 기미가 있기에 아뢰옵니다. 어젯밤 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모두들 나라 일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남이 장군만은 태연하게 혜성이 나타난 것은 옛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날 징조라 하니, 이는 곧 이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종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유자광은 더욱 간교한 어조로 아뢰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 남이 장군이 양인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시조를 한 수 지었었는데 그때부터 사악한 뜻이 있었던 것 같사옵니다.” 

유자광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예종에게 바쳤습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사나이가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훗날 누가 그를 대장부라 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유자광의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남이 장군은 원래 남아이십미평국이라 했는데 유자광이 평국(화평한 나라)을 득국(나라를 얻다)으로 바꿔버린 것이었습니다.

예종은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때 예종의 옆에는 영의정 강순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강순은 남이와 함께 여러 번 싸움터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남이는 강순에게 변명해 달라는 눈짓을 하였으나, 강순은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모르는 척하는 강순의 태도가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남이 장군은 고문을 받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영의정 강순과 역모를 꾸몄다고 자백하였습니다.  

유자광의 흉계에 말려 든 지도 모르는 남이는 28살의 아까운 나이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강순은 남이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변명 한 마디 안 해 준 탓으로 80세의 나이로 덩달아 억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다른설

 어떤 사람이 그가 공주와 간음하였다고 고해 바쳐서 하옥에 이어 모반으로 다스려 죽게 되었다. 바야흐로 남이가 국문을 받게 된 때에 강순은 영상(영의정)으로서 입참하였는데 남이가 강순도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말하니 강순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호적에 편입된 보통 백성으로서 성명(聖明)을 만나서 벼슬이 재상에까지 이르렀는데, 또 무엇을 얻고자 하여 남이의 음모에 가담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예종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 남이가 다시 말하길 "전하께서 그의 간사한 말을 믿고 사면하신다면 어떻게 죄인을 찾아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예종이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강순의 나이가 이미 80세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같이 참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르짖기를 "남이야! 너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무고 하느냐?"하니 남이가 말하길 "원통한 것은 너나 나나 같다. 네가 수상이 되어서 나의 원통한 것을 알고도 한마디 구해하는 말이 없으니, 너도 또한 원통하게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강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남이와 같이 죽어갔다.

  하여튼, 남이의 죽음은 지금까지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영의정인 강순이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죽게 되었을 때 임금님께 비록 꾸중을 들을 각오로 남이를 위해 변명을 해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 다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 남아서 아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 까요? 80세의 강순은 그때까지 살아 오면서 너무 계산속으로만 살아서 출세는 했을지 몰라도 인자함이나 너그러움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인자무적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질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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