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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김 대령 2010. 5. 21. 06:43

 

 

 

미인의 전설 '양귀비'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귀비"라고 답합니다.

한번도 그의 초상을 본 적이 없더라도 말이지요. 그녀는 이미 신화가 되었고, 사람들은 신화에 대해 별로 이견을 보이지 않습니다.

양귀비가 누구냐구요.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한번 볼까요.

이걸로는 아무 느낌이 오지 않겠죠.
당연합니다.
이제 왜 그녀가 동양 최고의 미인으로

대접받는 지 알아 볼까요.


 

시아버지와 며느리/그 터부의 사랑

당현종의 사랑인 양귀비는 실은 그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의 세자비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세력가인 숙부 양현교의 양녀로 자랐습니다.
재기넘치고 풍만한 미녀로 세자비로 들어온 그녀는 마침 아내 '무혜비'를 잃고 외로워 하던 현종의 마음을 흔든 것이지요.

740년 양귀비가 21세때, 54세이던 현종은 그녀를 수왕의 품에서 떼어냈고, 6년 후 그녀에게 '귀비'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정식 황후는 아니었지만 그와 맞먹는 것이었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고개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의 스캔들이지만 사실 옛날 중국에는 별 이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왕들은 10세도 안된 소년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고, 남매지간의 혼인도 빈번했습니다.

'터부'란 문화마다 다르게 마련이지요.  물론 이들의 사랑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황제의 뜻이라면'하는 분위기로  받아들여 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오히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랑은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대체 양귀비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하는 호기심부터 "나이많은  현종이 과연 젊은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을까"하는 좀 음흉한 궁금증이 꼬리를 문 것이죠.

물론 '금기를 깬'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상한 호기심은 양귀비를  더더욱 신비스런 인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요.  현종은 양귀비를 "말하는 꽃"이라며  애지중지 했다는 데, 33살이나  어린 여성을 보면 대부분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미인박명 (美人薄命)

양귀비가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양귀비의 친척들은 모두  고관대작에오르며 천하를 호령하게 됩니다.
어려 부모를 잃은 양귀비로서는 그나마 있는 자신의 친척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겠죠

친척을 통한 권력의 확대는 우리나라 궁중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지요.
6촌 오빠인 '양소'라는 이는 현종으로부터 '국충'이라는 이름을  받아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됩니다.

말을 타고 수십일 걸리는 남방산에서 나는 여지 (혹은 여주)라는 과일을 가져왔다는  얘기,

양귀비와 두 언니가 지나간 자리엔 금은 보화가 굴러 다녔다는 등 사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지요.

 

말에 오르는 양귀비 (워싱턴 프리아미술관)
 


그러나 현종이 나라 일을 등한히하고, 양국충이 현종의 양아들이었던 안록산(安祿山)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결국 756년 안록산의 난(安史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라를 망쳐 먹은 여자, 양귀비는 명주천을 꼬아 만든 줄로 목이 졸려 죽는 액살(縊殺)형에 처해집니다. 물론 이 명령을 내린 것은 안록산의 종용을 받은 현종이었죠.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도 여기서 생긴 겁니다. 박명이란 일찍 죽는다는 뜻이죠.
수백년 된 소나무가 곧게 뻗은 걸 보셨나요.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곧아서 가구 재료로 쓸만하면 일직 베어졌겠죠.     

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여자가 예쁘면 이사람  저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그러다 보면  '팔자'가 사나워 진다는 게 옛날 우리 어른들의 생각이었죠.

'미인은 복이 없다' 일직 죽는다'도 바로 '조용한 현모양처'를  바라는 가부장적 심리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사랑 멜로드라마로 살아나

양귀비가 궁에 들어온 것이 16세때, 혹 이때 바로 사랑에 빠졌다면 그의 나이 49세.                그리고 그녀가 죽은 것이 37세니까,  둘의 사랑은 21년이 유지된 거지요.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식지 않은것은 물론 황제가 장안 재탈환한 후에도,

영혼과의 사랑이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현종은 남은 생애 내내 양귀비의 그림을 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데,

현종은 꽤나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습니다. 

 

 황제와 양귀비가 사랑을 나눴던 침향
 

중국의 무장가 중의 하나인 백거이 (白居易)는 '장한가'라는 애절한 한시, 진홍(陳鴻)은 '장한가전'이란  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전해집니다.

장한가는 봉래산에 숨은 양귀비 영 혼의 입을 빌어 우리가 죽어 하늘 나라로 가면 비익조가 될 것이요/ 이 땅에 영원히 살며 연리지가  됩시다.

비익조는 암컷, 수것이 날개가 하나씩이라 언제나 함께 날아 다니 는 새, 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말하죠.

결혼식장중에 '연리지예식홀'이라는 곳이 있는데, 두 단어 모두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장한가가 발표 되자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싯구를 외우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다지요.

멜로 드라마를 보듯 장한가를 외웠을 것 같네요.

 

 

 

 

양귀비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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